12월 30일(수)

좌측 하단의 책은 『어둠의 속도』.
- 점심 쯤에 더지형의 집에서 나섰다. 선희 씨와 만나기 위해 부산에 가야 하는 날이었으나, 동대구역에 도착해보니 경부선 하행 열차 중 무궁화와 새마을은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 만나기 전에 어디라도 구경하려면 몰래 KTX라도 타야 할 판인지라 어쩔까 고민하다가 결국 해운대행 무궁화호를 탔다. 못참고 KTX를 탔으면 여행의 장르가 다큐멘터리에서 스릴러로 바뀌었겠지. 해운대역에서 선희 씨가 기다리는 동래역까지는 시내버스로 이동했다.
역에서 그를 찾아내었을때 선희 씨는 어떻게 잘 찾아냈다면서 웃었다. 그러나 8년 넘게 알아온 벗의 얼굴을 어떻게 잊겠는가. 설령 2년 만에 만난다고 해도. 저녁은 돼지국밥을 먹고, 인근의 모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었다. 앤티크 풍으로 장식된, 꽤 근사한 카페였는데 아쉽게도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기억난다 해서 다시 갈 것도 아니지만.대화는 내내 즐거웠다. 똑똑한 사람과의 대화란 늘 즐겁기 마련이지만. 선희 씨의 '똑똑함'은 책에서는 얻지 못할, 나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던 종류라 더 각별하다. 그가 인간관계에 대해 쏟아내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재밌으면서도 핵심을 꿴다. 물론 그러한 이야기들은 평소에도 메신저로 나누던 것들이지만, 역시 오프라인의 대화와 비할 바는 못되는 법이다.
오프라인에서는 천편일률적인 'ㅋㅋㅋ' 대신 다양한 웃음소리를 듣고, 엔터 키 사용 빈도와 대화 사이의 간격으로 뉘앙스를 가늠하는 대신 상대방의 표정과 제스쳐를 살피게 되니까. 그러한 '새' 정보들은 대개 내가 오프라인에서 만난 온라인 지인들을 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왔었다. 이번에도 그러했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내가 갈수록 '오프라인'에 집착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필명으로보다는 실명을 더 기꺼워하는 것도. 내 소중한 벗들을 온라인 상의 텍스트로, 이진법적 기호 따위로 취급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1시쯤 하여 자리가 파한 뒤에는 PC방에 들어가 야간 정액을 끊었다. 일부러 넷북도 두고 왔으면서 PC방에 들어가는게 스스로도 심히 괴이하게 느껴지긴 했으나, 찜질방비보다는 야간정액비가 더 쌀 듯 하여 저지른 짓이었다... 하지만 역시 찜질방에서 자는게 더 나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집안 사정상 가게를 하나 접게 되었다'고 말한 여성이 '그래도 의대생 남친 있잖아요.' 하는 리플을 얻어듣는 황당한 광경은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니네 집 망해도 넌 이미 물주 잡았으니 된거 아니냐'는 식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한 발언이다. 제3자인 나조차도 말문이 막힐 정도의 무례한 농짓거리였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대체 뭐라고 쏴대야 할까 한참 생각하다가 당한 분이 적당히 농담으로 받아들인듯 넘어가길래 관두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까지 내가 나서면 일이 좀 황당해지니까. 이후에는 다른 게시판에서 장르문학 이야기를 하기 위해 채팅방을 열었더니 별 영양가도 없는 음담패설만 오갔다...
12월 29일(화)

사진이 좀 볼품없게 나오긴 했지만 실제 광경이라 하여 더 나을 것도 없었다.
- 여관 주인이 해돋이 시각에 맞춰 깨워주었다. 부탁하지도 않은 짓을 왜 하나 싶었다. 해돋이보다야 이불이 더 간절했지만 기왕 일어난 김에 나와버렸다. 해돋이를 보기는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싱거웠다. 해돋이 대신 파도만 들여다보다가 다음 열차를 탔다.
제천의 역전시장에서 점심을 먹는데 더지 형에게서 연락이 오길래 오늘은 대구에 가기로 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형과 합류하기 위해 대전역에서 내려서는 역내 서점에서 소일했다. 날개님이 미투데이에서 이야기하셨던 『글쓰기 표현사전』이 보이길래 잠시 훑어봤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워낙 두꺼운 책이라 사지는 못했다. 대전역에서 열차를 타기 직전에 목도리와 장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별 도리가 없어 그냥 기차를 탔다. 그나마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은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 안에서는 더지형과 같지 앉질 못해 서로 책이나 봐야 했다. 나는 『요정들의 사랑』을 마저 읽은 후 『낯선 조류』를 조금 더 읽었다.
동대구역에 도착한 뒤에는 둘다 배가 몹시 고팠던지라 닭똥집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 이 지역에서는 특이하게도 소금구이가 아니라 튀김이었다 - 더지형의 고향 친구와 만나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처음 마셔본 '참소주'도 무척 맛있었거니와 - 소주 특유의 역한 맛이 거의 없었다! - 합석한 그 형도 정말 소탈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처음 본 사람과 그렇게 편한 자리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었는데. 몸이 피곤한 까닭에 후반부에는 거의 간신히 버텨야 했었지만, 몸이 더 괜찮을 때 만났다면 정말 좋은 자리였을 터이다. 이 자리에서는 더지형과 내가 서로를 "진석이"와 "세환이 형"으로 불렀다. 평소 동아리에서는 서로를 동물 이름으로 부르다 보니 실명을 쓸 일이 거의 없다.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다. 동아리 밖에서도 실명으로 불릴 일이 썩 많지 않은 나로서는 내심 반갑기도 했었고. 술집에서 나온 뒤로도 여기저기 거리를 쏘닐며 낄낄대고, 만두를 씹다가 더지형의 집에 가서 잤다.
12월 28일(월)
- 여행 첫날-이었으나 학교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결국 늦은 오후에야 출발했다. 애당초 무목 여행이었으니 그나마도 상관 없는 일이긴 했다. 오후 다섯 시에 청량리역에서 강릉행 열차를 탔다. 딱히 심심하진 않았다. 무궁화 열차가 생각 외로 승차감이 좋질 않아 노트와 펜을 쓰는데 애를 좀 먹긴 했지만 그 외에도 책이나 음악 등 소일거리는 충분했다. 하지만 결국 숙소에 두고 온 넷북 생각이 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졸다 깨다 하며 가다 보니 '정동진'이라는, 뭔가 익숙한 지명이 보이길래 불쑥 내렸다. 이때는 이미 열한 시를 넘긴 시간. 혼자 다니는 여행객이라 방 잡기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었으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호객하는 사람이 득실거려서 방 거절하기에 바빴다. 두어 시간 정도 바닷바람을 쐬며 거닐다가 칼국수 한 그릇 사 먹고는 방을 잡았다. 가격은 대략 2만원. 이 날은 『기프트』를 읽었다.
12월 27일(일)
- 동아리 종강총회가 열렸다. 예전 같은 종강총회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동아리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나는 이번 학기에 진행했던 세미나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고, 세미나의 뒷처리가 파행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번거롭기도 했지만, 너절한 꼴을 보이기 싫은 탓도 컸다. 이어진 뒷풀이에서는 이상스럽게 평소보다 빠르게 마셨고, 결국 술자리 도중에 잠들어버렸다. 자리가 파할 때쯤 깨었는데, 뒷목이 몹시 아팠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초속 5cm》를 봤다. ㅇ님이 미투데이에 남기셨던 코멘트를 좀 더 자세하게 읽었어야 했다. 보지 않는게 나았으리라.
12월 26일(토)
- 새벽에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할 때는 시계 태엽 돌아가는 소리에도 눈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잠자리에 민감한지라 편히 자지 못하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날의 소음은 내 예상 이상이었다. 어린 사촌 녀석이 삼촌의 노트북으로 새벽 2시까지 무한도전을 보며 킥킥거리고 사촌 형은 가래 섞인 기침을 수시로 뱉어댔으니... 이 외에도 각양각색(?)의 소움으로 인해 누워있는 것 자체가 고역일 지경이었다. 결국 부엌으로 도망쳐서 새벽 내내 『민들레 와인』을 읽었다. 코골이와 이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홀로 깬 새벽에는 더없이 좋은 서정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