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하긴 했지만, 지금 전공에 많이 질린 상태다. 전공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기타 외부 조건으로 인해 넉다운된 상황이다. 사실 전공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수업에는 영 관심없어하는 빵점 학생이었다곤 해도 내가 유학에서 배운게 적지 않은 까닭이다. 특히 2007년 초에 정도원 선생님과 『대학』·『중용』 강독을 하면서 익혔던 구절들은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러한 구절 몇 가지.
※ 여기 이야기되는 썰들은 유학의 전통적인 해석과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는 내 식으로 재해석한 것들이니, 혹여 이러한 경전들을 진지하게 공부하려 하는 분들이라면 크게 귀담아듣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
1.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중용)
"도란 것은 (일상과)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일상을)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라고 풀이되는 구절이다. 내가 특히 흥미롭게 봤던 대목은 "(일상을)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라고 한 부분이다. 철학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공간이며, 우리네 일상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공리담론에 주목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통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나에게는 자기 안의 세계와 공상에 빠지는 대신 자기 주변의 현실과 교감하라는 주문으로 들리기도 했었다.
요즘 같아서는 이 조언이 조금 다른 방향에서 들리기도 한다. 이 구절에서는 일상 공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대체 '어떤' 일상에 충실해야 하는 걸까. 이영도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단수가 아니며, 내가 마주해야 하는 공간 또한 하나가 아니다. 우리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나', 학과에서의 '최진석 씨', 우리역사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의 '문어', 장르문학 팬덤에서의 '아프락사스'가 마주해야 할 일상 공간은 천차 만별이다. 그 중에 내가 파고들어야 하는 일상은 어디인가. 물론 그 중에 하나만 남겨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그 모두가 내 일상일 필요 있을까.
특히 장르문학 팬덤 생활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사실 이 문제는 이 블로그에서만 해도 꽤 여러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금의 내게도 팬덤 커뮤니티가 필요할까?」라는 글에서는 팬덤 커뮤니티를 아예 '매트릭스', 허상의 공간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었고. 지금도 그 생각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팬덤 생활을 포기하지 못한다. 마음에 차지 않는 공간을 떠나고자 해도 그에 합당한 대안이 없다면 청산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예전에 『솔라리스』역자 후기에서 스타니스와프 렘이 (미국의) SF 팬덤에 대해 "이른바 '팬진fanzines'에 게재되는 독자들의 편지를 읽어보면 SF 창작은 변명에 불과한 경우가 많고, 실제로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좌절한 사람들의 상호 교류의 장場을 찾기 위한 시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며 독설을 퍼부었다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꽤나 씁쓸해했던게 생각난다. 이영도가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남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자신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에게서 백안시당하며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들 중에도 드물다."라는 문장도.
2. 絜矩之道 (대학)
대학 "윗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아랫사람에게 시키지 않으며, 아랫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윗사람을 섬기지 않으며, 앞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뒷사람을 이끌지 않으며, 뒷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앞사람을 따라하지 않으며, 오른쪽 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왼쪽 사람에게 건네지 않는" 태도를 줄여 이르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격언이 『대학』에만 나오는 말은 아니다. 아마 예수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7:12)라고 말한게 가장 유명하겠지만 이 역시 유대교 경전에서 내려오는 황금률을 예수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유학에서도 "나를 미루어 남을 헤아린다"(推己及人)거나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다"(己所不欲勿施於人) 등 유사한 격언들이 많이 나온다.
그래도 나는 '혈구지도'라는 말을 유독 좋아하는 편이다. 이는 이 네글자의 조어가 보편적 윤리인 황금률을 간명하게 잘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과는 다른 유학적 논리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혈구지도(絜矩之道)란 말에서 혈구(絜矩)란 목수들이 쓰는 곱자를 뜻하는 말이다. 곱자에 한번 그어진 눈금은 변하지 않는다. 같은 길이를 재는데 한번은 3cm로 나오고 또한번은 5cm로 나온다면 그게 제대로 된 곱자일리 없다. 3cm는 3cm일 뿐이다.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비유는 이런 곱자에 주목한다. 어떤 사안에 대한 판단 기준은, 일단 한번 정해진 이상 누구에게나 공정히 적용되어야 한다. 내 스스로에게 적용되는 바와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바가 같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보편적인 원리를 우리는 보편 윤리, 원칙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혈구지도라는 비유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자기 자신도 하지 못하면서, 혹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면, 애당초 제대로 된 주장이라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서양의 형식 논리학에서는 전형적인 '인신공격의 오류'로 지적되겠지만, 유학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 유학에서 주장과 실천은 함께 가야 한다고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접한 뒤로 나는 께름칙한 주장을 접하면 일단 그 주장의 논리 구조를 분석한 다음 과연 그러한 주장을 편 사람 자신은 그러한 논리에 충실한가를 따져보는 버릇이 생겼다. 당장 생각나는 예라면 예전에 커그에서 일어났었던 '재미 vs 가치' 논쟁에 달았던 댓글.
매번 같은 소리를 하게 됩니다만... 재미지상주의자들이 진정 짜증나는 건 그들이 주장하는게 취향의 평등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의 불평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는 주장의 기본 구조는 그들이 비판하는 이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어요. '내가 재밌어하는 건 인정받아야겠지만 네가 재밌어하는 건 인정 못하겠다'는 거죠. 어느 한 취향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위해 꼭 'XX한 것보다는...' 하는 식으로 다른 취향을 깎아내리곤 한다는게 문제죠. 평소에는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하며 약한 척 하다가도 기회만 있으면 팔레스타인을 피바다로 만들곤 하는 이스라엘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2009/01/24
최근에 이글루스 등지에서 일어났던 소위 '호모포비아 논쟁'이 우습기만 했던 것도 어느 정도는 이런 버릇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했던 호모포빅들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게이 혐오도 취향이니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달라"쯤이 된다. 듣고는 어이가 없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나는 게이를 혐오한다'라는 문장이 '나는 짜장면을 혐오한다'와 같은 선상에서 논의될만 하느냐, 호모포빅들이 요구하는 '표현의 자유'와 동성애자들이 요구해왔던 '표현의 자유'의 수위가 비교가능한가 등의 사안은 일단 제껴놓도록 하자. (이러한 문제는 다른 글에서 다룰 것이다) 이 글과 관련하여 나를 웃겼던 것은 그 잘난 '혐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정작 남들에게도 호모포빅 자신들을 혐오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줄여본다면 '나는 게이를 혐오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너는 그런 나를 혐오한다고 말할 수 없다' 쯤이 될까. 익명게시판에 흔해빠진 키보드 파이터들이 더 윤리적이겠다 싶어서 우습기만 했었다.
3. 誠於中 形於外(대학)
"내면이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내면의 인격이 외양에도 반영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경구에서 이야기하는 외양(外)이란 단순 외모만이 아니라 표정과 말씨, 몸가짐 등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잘생긴 사람은 성격도 좋고 못생긴 사람은 성격도 나쁘다는 식의 단순한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잘생겼냐 못생겼냐를 떠나서 한 사람의 행동 방식이 그 사람의 본질을 말해준다는 거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최근에 이 말을 곱씹을 기회가 생겼다. 정도원 선생님 수업이 종강하는 날 그 뒷풀이에서 정도원 선생님께서 나의 겉모습이 예전과 어떻게 달라졌으며 내 내면 또한 어떻게 달라졌는지 짚어주셨던 거다. 옷을 어떤 걸 입었고 안경을 어떤 걸 꼈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언변이 편해지고, 내 웃음이 예전보다 자연스러워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짚어주시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다시 한 번 '성어중 형어외'를 곱씹었었다.
'성어중 형어외'라는 말을 들으면 한 가지가 더 떠오른다. 여기부터는 거의 내 멋대로의 해석이다. 이 경구에 따르면 내면(中)이 변하면 밖(外)으로 드러나는 외양 또한 변한다. 그렇다면 그 달라진 외양을 접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평가 또한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경우에는 외양(形)이 中이 되고 타인과의 관계는 外가 된다. 결국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와 평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을 닦으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은 주머니를 뚫는다'는 말과도 통한다고 할까.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가 가진 것 이상의 평가를 얻어내려 억지를 쓴 경우가 참 많았다. 요즘 말로는 허세라고 하는 걸 텐데, 그리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특히 2006, 2007년에 썼던 글들은 대부분 허세의 반영이었다고 해도 좋다. 알건 모르건 어떻게든 끼어들어서 아는 척을 하고 잘난 사람이라고 인정받으려 했던 시절. 뭐, 그 허세의 결정체였던 '판작안'만 해도 결국에는 내가 더 많은 독서를 하고 더 많은 공부를 하는데 일조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것도 일종의 성장통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성장통이란 결국 언젠가는 끝나야 하기 마련이다.
"개념인으로 불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개념글을 쓰라. 개념글을 쓸 실력이 되지 못하는가? 개념글을 쓰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자기 발전을 하라. 그렇게 차근 차근 자기 내면을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기 마련이다." 이런게 요즘 내가 성어중 형어외를 곱씹으며 떠올리는 사고들이다.
4. 愼獨
'혼자 있어도 삼간다'는 말로, 주어를 붙여 군자신독(君子愼獨)이라고도 한다. 원칙을 세웠으면 남들이 보지 않을 때에도 그에 맞춰 행실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뜻이다. 신념과 원칙은 1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에, 정말 옳은 원칙을 세웠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2번에서 이야기한 황금률과 어느 정도 통하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마하는 '혼자다'(獨)라는 표현이 말 그대로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만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인터넷 게시판 상에서 익명을 써서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 이 또한 홀로 삼감에 대해 이야기할만한 상황 아닐까.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그렇지 않는데 디씨에서만 유독 말을 험하게 하는 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다. 디씨 자체가 상호하대를 원칙으로 하는 공간이다 보니 그쪽의 룰을 지키다 보면 어느 정도는 거기에 물들기 마련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요즘은 또 그렇지도 않은 듯 하지만 예전에 디씨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다른 커뮤니티의 '젊잖은' 게시판 문화를 두고 비꼬는 사람들이 많았다. 위선과 가식이 넘치는 공간이라는게 그네들 주장의 골자였다. 하지만 그렇게 솔직하다는 그네들 중에서, 디씨에서의 태도를 오프라인에서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타 게시판의 사람들을 위선적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사실은 그네들 자신이 위악적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내가 디씨에서도 평소의 어조를 버리지 않으려 하는 것도 이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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