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월 10일(수)
  • 새벽까지 계속 눈이 내렸다. 학교에 와보니 나무마다 눈꽃이 피었길래 두어 사람과 학교 뒷산에 다녀왔다. 사진도 찍어봤지만 결과물이 시원찮아서 영 섭섭했다. 녹음은 기본 기능도 쓸만하던데, 사진이나 동영상은 역시 어플을 써야 하는 모양이다.
     
  •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을 무렵, (이제는 준회원쯤 취급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새내기가 동방에 왔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간만 잘 맞았다면 같이 산책 가는 거였는데. 아쉬운 일이다. 둘회장이 나중에 전화를 걸어본뒤에야 그 새내기가 실은 '둘리 언니'를 찾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3월이 채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후배가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데 성공한 건가 싶어서 속으로 많이 웃었다. 2학년 애들이 새내기들을 많이 겁내길래 새내기 없는 자리에서는 일부러 그 새내기들을 '애기들'이라고 호칭하곤 했는데, 적어도 둘회장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겠다.
03월 09일(화)
  • 아침의 '현대 소설의 이해'는 거의 졸다시피 했고 점심 이후의 '국문학사'도 상당히 힘겹게 들었다. '현대 비평의 이해'만 맨정신으로 들었다. (워낙 내 관심사라 졸 수도 없는 수업이었다) 아이폰으로 강의를 녹음시켜둔 덕에 - 음질도 꽤 쓸만하다 - 수업 진도야 걱정할게 아니다. 다만 내 체력은 좀 걱정된다. 요새 체력이 떨어졌다는게 확실히 느껴진다.
     
  • 『새 민족문학사 강의』 1권, 『중국근대사상사론』, 『폭력과 성스러움』, 『프랑켄 마르크스』를 구입했다.
03월 08일(월)
  • 월요일 내 첫 수업은 4시 반에 시작한다. 그러나 새내기 공개 모집 때문에 9시부터 학교에 나가야 했다. 도착해보니 회장 혼자 앉아있었다. 내가 오기 30분 전부터 와 있었다고 했다. 잠시 뒤에 더지 형도 도착했으므로 짐을 옮긴 뒤 새내기 공개 모집을 준비했다. 아침부터 앉아 있어봐야 춥기만 하고 지나가는 새내기는 없었다. 점심 때까지 버텨보자니 저번에 들어온 새내기들이 와서는 새내기 모집에 참여했다. 새내기가 새내기를 받다니 이게대체 무슨 광경인가 싶었다. 
     
  • 새내기 공개 모집 때 수고한 새내기들을 치하하기 위해 저녁 식사를 했다. 대개 이런 자리는 빠지지 않지만 나만은 9시 반쯤 하여 일찍 나와야 했다. 술을 마시다 그 자리에서 조는 거야 심심찮게 있던 일이지만, 그렇게 졸다가 의자에서 떨어질뻔한건 처음이었다. 옆에서 계속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던 새내기 애가 아니었으면 정말로 떨어졌을 거다. 이런 일에는 나라도 식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물과 우유를 마시며 몸을 다스리려 했지만 숙취가 좀체 가시지 않았다.
03월 07일(일)
  • 종일 아이폰을 들고 낑낑거렸다. 어쨌든 음악 추가, 앨범 커버 사진 교체 정도는 보다 수월해졌다. 고생스럽기는 했어도 태그와 앨범 커버를 싹 정리하고 나니 보기 좋다.
     
  • 예비군 통지서가 나왔다. 그런데 학교에 신청을 안해놨던 바람에 잘못하다간 광주에 가서 받아야 하게 생겼다. 그것도 좋아하는 수업만 꽉꽉찬 목요일에... 
03월 06일(토)
  • 동방에서 새내기 모집 준비를 했다.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빨리 끝났다. 모기 형의 빠른 진행 덕이다. 처음에는 '그래도 첫 사업인데 회장이 지휘하게 하는게 낫지 않나' 싶었지만, 끝나고 나서 모두들 빨리 끝나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걸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업무를 배우는게 중요하긴 하지만 그걸 굳이 맨 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익히게 할 필요는 없다. 효율적인 예를 하나 보여주는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거지. 아마 모기 형이 없었다면 회장 혼자 지휘하느라 시간이 배는 더 걸렸을 테고, 그만큼 많지 지쳤을 터이다. 목요일부터 계속 강행군을 달려온 주체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었을 테고. 확실히 한 집단에는 여러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 기회였다.
     
  • 저녁에는 아버지가 숙소로 오셨다. 가볍게 식사와 반주나 하자는 것이었는데, 아버지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워낙 높아진 통에 고기류는 못드시는데 하필 숙소의 저녁 식사 메뉴는 감자탕이었다. 아버지가 나혼자라도 먹고 오라시길래 버럭한 다음 같이 식당에 가서 떡만두국을 사먹은 후 동동주를 서너병 정도 나눠마셨다.
     
  • 아버지가 광주 가셨을 때 동생이 내 이름을 부르며 함부로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착실하게 장학금을 벌어오는 자신은 광주에 있는 통에 용돈을 별로 받지 못하는데 성과도 시원찮은 내가 서울에 있다는 이유로 집안의 지원을 받는게 불만인듯 싶었다. 그 애가 내게 품은 감정이야 역사가 깊으니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 정도로 노골적으로 표현한다는데서는 다소 놀랐다. 결국에는 내가 얕보인데서 비롯된 일일 터이다. 이번 학기 성적의 중요성을 절감하겠다.

03월 01~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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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월 28일(일)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음에 뭘 읽을까 고민하다가 『삼성을 생각한다』를 집었다.
     
  • 화요일부터는 다시 핸드폰을 쓰게 된다. 아마도 번호는 그대로.
02월 27일(토)
  • 핸드폰 없이 살기 시작한지 3일째. 그래도 별일 없이 산다. 그냥 이대로 쭉 없으면 좋겠다. 아들을 타지에 보내신 부모님만 아니었으면 핸드폰 잃어버리기 전에 내 손으로 끊었다. 아이폰 그까이꺼 사실은 아이팟으로도 충분한데 뭐. (물론 나에게는 아이팟이 없다...)
     
  • 깜빡 했었는데, 이 날이 회계사 시험일이었다.  내가 점심 때까지 늦잠을 자고 본디오 빌라도와 바라바에 대한 자료를 뒤지던 시간에 내가 아는 누군가들은 회계사 시험을 치렀을 것이다. 로버트 하인라인에 대한 자료를 읽던 저녁에는 그 뒷풀이가 한창이었을 테고. 핸드폰이 없어진 통에 그간 고생했다는 문자 한 통 보내주지 못했다. 핸드폰이 없어서 아쉬웠던 대목이라면 그것 뿐이다.
     
  • 필리핀 갔던 S 씨가 귀국했다. 사실은 수요일에 돌아왔지만 그 직후에 조부 상을 당하는 바람에 이런 저런 뒷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사람 대하기도 귀찮아서 메신저도 접속 안했다가 내 생각이 나서 들어왔다고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이야기하던 와중에 필리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강사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몇 번 이야기를 들어서 대충은 아는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귀국 후 밥도 안먹고 멍하니 있더라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웃으면서 그 녀석, 지금이니까 실연남 컨셉 잡고 찌질거리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자기 좋아한다는 여자애랑 손잡고 룰루랄라 잘 지낼 거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것 말고 그에게 무슨 해결 방안이 있겠는가.
02월 26일(금)
  • 요 며칠간 기분이 몹시 안좋았었다. 새벽에 네이트온에서 신세한탄에다 평소라면 절대 안할 우폭 드립까지 시전했더니 다소 진정되긴 했지만(얼결에 상대해주셔야 했던 분에게 심심한 사과를...) 상태는 여전하다. 평소 같으면 내가 미쳤나보다 하고 마는데 이번에는 세상도 같이 미친 모양이다.
     
  • 어제 없어진 핸드폰을 찾으러 교보문고에 다시 한번 찾아갔지만 찾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어제 잠시 들렀던 AMOKKA까지 갔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안그래도 아이폰 살까말까 고민중이었는데 이렇게 실현하게 되는 모양이다.
     
  • 광화문에 다녀오는 지하철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마저 읽었다. 좋지 않은 의미에서 교과서적인 성장 소설이었다. 캐릭터들이 자꾸 자신의 상징에 대해 직접적으로 떠들어대는게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영도 단편들을 씹어댈 때가 생각나기도 했고. 다른 독자들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관되게 자기 안으로 천착하는 글을 써왔던 작가가 이제 와서 왜 이런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책을 읽기 전에는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점 때문에 어떤 평을 내려야할지 고민했었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이유에서 평을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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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신청일이었다. 복전 첫학기인 이번 학기부터는 수강신청 좀 제대로 해보겠다고 수강신청 시작 30분 전에 중도에 도착했건만...

  1. 예전에도 잘 썼던 도서관 컴퓨터 예약 시스템을 못 써서 버벅댈 줄이야.
  2. 도서관에서 내가 예약한 컴퓨터 자리가 어딘지 몰라서 헤맬 줄이야.
  3. 결국 자리를 바꿔서 겨우 앉기는 했는데 도서관 컴퓨터가 내 넷북보다 구릴 줄이야.
  4. 넷북을 켰더니 그 사이 공짜 무선랜 아이디 인증 기간이 끝나서 다시 받아야 했을 줄이야.
  5. 무선랜 인증 받으러 학교 사이트 들어갔더니 수강신청의 여파로 여기까지 마비되었을 줄이야.(이때부터 이미 수강신청 시작)
  6. 겨우 인증을 마치고 접속하니까 사실 도서관 컴퓨터가 느렸던 건 로그인 프로그램이 V3 백신에 걸리는 바람에 로그인을 안한 상태에서 쓰는 바람에 그리 되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될 줄이야.
  7. 수강 신청 사이트에 로그인을 하자니 내가 수강 신청 사이트 패스워드를 잊어버렸을 줄이야.
  8. 어찌어찌 로그인하고 보니 아뿔싸, 책가방에 세 과목밖에 안넣어놨을 줄이야.


클릭하면 아마도 커집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짠 시간표라 당연히 시망일 줄 알았는데, 글을 쓰면서 다시 확인해보니 그렇게 망친 시간표만은 아니다. 며칠 전에 확인했을 때는 못 봤던 「현대소설의 이해」과목을 넣는데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무적인 사실 아닌가. 여기 나온 강사 '이명원'이 내가 아는 그 이명원이기만 하다면야. 「현대작가론」은 여성학 연계 전공에서 건진 과목. 문제라면 「국문학사」 정도다. 같은 시간대의 「문학과 젠더」라는 과목과 바꾸고 싶지만 여성학 과목이라 신청하기가 쉽지 않다. 전공자 TO는 10명 이상이 남는데 비전공 TO는 총원이 겨우 4명이라 영 까다롭다. 「현대작가론」는 국문과 과목이기도 해서 어떻게 우회하여 등록했었지만 이건 정말 답이 없을 듯. 일단은 수강 변경 기간을 노려볼 생각이다.

제1전공 과목도, 예년에 비하면 나쁘진 않은 편이다. 「동양미술사」는 꽤 오래 전부터 듣고 싶어했던 과목을 이제야 듣게 된 셈이니 생략. 「청대실학과 근대사상」는 사실 별로 관심가지 않는 과목이지만 지도교수님 과목이라 뺄 수 없었던 과목이고...

어차피 정정기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지금 같아서는 뭐 그럭저럭 선방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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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월 31일(일)
  • 국문과 복수전공 신청이 성공했다. 학점이 워낙 낮아서 거의 성공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게 된 셈이니 분명 좋아할 일이건만.
     
  • 동아리 합숙 회의가 열렸다. 상당한 충돌을 각오했었지만, 막상 회의에 들어가보니 뜻밖에도 순탄하게 흘러갔다. 합숙은 파토. 예상했던 부분이다. 문제는 그 다음. 합숙 파토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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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인 오늘날도 전쟁과 학살이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피로 얼룩지는 직접적인 폭력만이 폭력은 아니다. 지금은 물론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전 세계를 휩쓸었고, 이로 말미암아 대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은 더욱 강화되고 교묘해졌다. 이는 대중의 삶을 위협하는 또 다른 형태의 구조적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에 맞서 대중은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힘껏 맞서 싸워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힘에 부친다.

대중의 삶의 위기는 가중되는데, 자본과 권력은 대중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양보하라 한다. 대중은 저항을 계속하고 있지만, 절망의 터널은 그 끝을 드러내지 않는다. 누구도 희망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지만, 그 희망을 현실화할 수단은 여전히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빈곤과 실업의 덫에 허우적거리고, 열악한 임금노동에 혹사당하는 수많은 대중의 머릿속은 불안, 비관,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대안이 절실히 필요하다. 위기의 폭이 넓고 깊은 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대안은 더욱 근본적이고, 간결하면서도 강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안은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 구체적인 요구, 대중의 삶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요구여야 할 것이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매개로 힘을 모으려는 시도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도 많다. 이 또한 현재의 위기를 지속시키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러한 주저함을 내던지고 대안을 향해 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와 우리 시대를 둘러싼 낡은 족쇄를 끊어내고 인류가 쟁취해야 할 세계사적 과업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19세기 노예제 폐지, 20세기 보통선거권 쟁취에 버금가는 21세기 세계사적 과제로 기본소득 쟁취를 들고 나온 사람들이 있다. 기본소득을, 세계적 금융 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공감하는 우리는 그 가능성과 현실성 또한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해왔으며, 지역 공동체에서부터 국가 단위,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기본소득의 실현을 모색하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제도화 노력까지 기울여왔다. 그 소중한 결실 가운데 하나가 지난 2004년 국가 단위로는 세계 최초로 브라질에서 시민기본소득법이 제정된 것이다. 기본소득이 세계 각국에서 제도화되기까지는 여전히 수많은 과제와 도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소득이 없거나 형편없는 소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수많은 대중이 존재하는 현실은 기본소득을 사회적 의제로 강력히 밀어올리고 있다.

이러한 지구적 차원의 흐름에 발맞춰 한국에서도 비로소 기본소득이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서울에서 열리는 이번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는 기본소득 의제의 확산을 위한 커다란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대회를 빛내주기 위해 현대적인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해왔으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국제위원회 의장인 필립 판 빠레이스, 브라질 시민기본소득법 제정의 주역이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명예 공동의장인 에두아르도 수플리시 등의 국외 인사들이 방한했으며, 한국의 기본소득네트워크 및 기본소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최소한 그 취지에 공감하는 수많은 사람이 이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이바지했다.

이 대회를 이끈 기본소득 서울 선언 참가자들은 다양하다. 기본소득 지지자들도 다양한 지지 배경을 갖고 있다. 기본소득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 사람도, 하나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를 넘어 어떠한 기본소득인가를 놓고도 많은 쟁점이 있다. 기본소득은 시대의 거대한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이와 연관된 많은 난제도 뒤따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본소득이 그 자체로 현대 사회의 문제 모두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다는 점이다.

이 시대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선언을 넘어 어떤 세상이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그 세상을 실현할 수 있는지를 답하라고 요청한다. 기본소득 서울 선언 참가자들이 힘주어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본소득이 이러한 답의 주요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대안사회를 향한 가능성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성과 접목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본소득 서울 선언 참가자들은 이 대회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기본소득 논의가 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하며, 또한 이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할 것이다.



2010년 1월 27일 

기본소득 서울 선언 참가자 일동 


선언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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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중 계획

일기/잡담 2010/01/10 17:01
시기상 방중 계획보다는 연중계획이 더 시급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1. 그리스어 공부(무산)

이번 방학 중에는 연대에서 열리는 초급 그리스어 스터디에 참가한다. 말이 스터디지 사실은 그쪽 철학과에서 모 선생님이 진행하는 과외 수업에 가깝다. 저번 학기부터 알고 지낸 같은 과의 벗이 소개해준 덕이다. 그 덕에 앞으로 금요일은 신촌에서 보내게 생겼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참에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다. 헬라어야 독학이 번거롭고 따로 배우자고 해도 수업료가 부담되서 손대기 어려운 과목 아니던가. 그리스어 알파벳조차 읽을 줄 모르는 내가 어느 세월에 독해가 가능한 실력을 갖추랴만, 일단은 꾸준히 해볼 생각이다.

2. 독서량을 절반으로 줄이기

얼핏 들으면 좀 이상해보이기야 하겠지만 내게는 절실한 목표다. 한해 독서량을 측정하기 시작한 2007년부터 따져보니 해마다 거의 100권 가량의 책을 읽었다. 100권이래봐야 별 대단할 것도 없는게, 200권 중 실상 읽었다 할만한 책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전에 먹은게 소화되기도 전에 바로 게워내고 다른 음식을 쑤셔넣는 식의 독서였으니 당연하다 하겠다. 독서량 관련 질문을 받을 때 '이 정도 읽습니다' 하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감탄이야 사겠다만 그 외에 실익은 없다.

이런 식의 독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말,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거듭 읽으면서부터였다. 처음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과 지금의 감상은 가히 천지차이 수준이다. 수많은 정치적·종교적 비유와 상징 따위가 정교하게 삽입된 이 소설을 처음 한 번의 독서만으로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그러한 독서의 경험은 내가 얼른 읽고 치워버리기에 급급했던 수많은 책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중에서 내가 제 진가를 확인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책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런 생각에 한번 빠지면 재독의 욕구를 참기 어려워진다. 특히 르 귄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따라서 올해는 독서량을 가능한한 줄이는 대신 계획적으로 선정한 작품들을 보다 밀도있게 읽고자 한다. 물론 관심 가는 신간들이야 계속해서 사겠지만서도. 나오자 족족 사두지 않으면 얼마 못가 절판되어버리는 한국 도서 시장의 특성상 이 정도 타협은 불가피하다.

3. 8편 이상의 리뷰 쓰기

2번과도 연결되는 목표. 책을 종전보다 세밀하게 읽겠다면 그에 대한 피드백도 당연히 종전에 비해 더 나아져야 하는 법이다. 한해에 50권의 책을 읽겠다고 한다면 방학 동안에는 어림잡아 8권을 읽게 된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읽는 책마다 리뷰를 작성하고자 한다. 당장 계획중인 리뷰는 『시간 여행자의 아내』. 초고는 70%정도 썼고, 합평회에서 얻어맞는 과정을 거쳐 대략 이달말쯤이면 끝낼 듯 싶다. 이 외에도 예전에 쓰다가 잠시 접어둔 과학 교양서 리뷰도 다시 써야 하고.

4. 복수 전공 확정

문학을 복수 전공하기로 했지만 정확한 과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문학 비평 수업이 많은 과라면 어디든 상관 없다는 주의였으나 우리 학교 어문 계열 학과들의 커리큘럼을 보니 대부분 어학원에 가까운 형상인지라 그야말로 GG. 그나마  국문과와 영문과는 좀 나은 편이라 이 두 곳 중 하나로 결정될 듯 싶다. 비평 수업 자체는 국문과에 더 많지만 고전문학수업들을 감당해낼성싶지 않다. 같은 고전문학이라 해도 영문과 쪽은 셰익스피어와 초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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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

일기/잡담 2010/01/05 05:51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하긴 했지만, 지금 전공에 많이 질린 상태다. 전공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기타 외부 조건으로 인해 넉다운된 상황이다. 사실 전공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수업에는 영 관심없어하는 빵점 학생이었다곤 해도 내가 유학에서 배운게 적지 않은 까닭이다. 특히 2007년 초에 정도원 선생님과 『대학』·『중용』 강독을 하면서 익혔던 구절들은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러한 구절 몇 가지.

※ 여기 이야기되는 썰들은 유학의 전통적인 해석과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는 내 식으로 재해석한 것들이니, 혹여 이러한 경전들을 진지하게 공부하려 하는 분들이라면 크게 귀담아듣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

1.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중용)

"도란 것은 (일상과)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일상을)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라고 풀이되는 구절이다. 내가 특히 흥미롭게 봤던 대목은 "(일상을)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라고 한 부분이다. 철학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공간이며, 우리네 일상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공리담론에 주목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통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나에게는 자기 안의 세계와 공상에 빠지는 대신 자기 주변의 현실과 교감하라는 주문으로 들리기도 했었다. 

요즘 같아서는 이 조언이 조금 다른 방향에서 들리기도 한다. 이 구절에서는 일상 공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대체 '어떤' 일상에 충실해야 하는 걸까. 이영도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단수가 아니며, 내가 마주해야 하는 공간 또한 하나가 아니다. 우리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나', 학과에서의 '최진석 씨', 우리역사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의 '문어', 장르문학 팬덤에서의 '아프락사스'가 마주해야 할 일상 공간은 천차 만별이다. 그 중에 내가 파고들어야 하는 일상은 어디인가. 물론 그 중에 하나만 남겨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그 모두가 내 일상일 필요 있을까.

특히 장르문학 팬덤 생활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사실 이 문제는 이 블로그에서만 해도 꽤 여러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금의 내게도 팬덤 커뮤니티가 필요할까?」라는 글에서는 팬덤 커뮤니티를 아예 '매트릭스', 허상의 공간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었고. 지금도 그 생각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팬덤 생활을 포기하지 못한다. 마음에 차지 않는 공간을 떠나고자 해도 그에 합당한 대안이 없다면 청산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예전에 『솔라리스』역자 후기에서 스타니스와프 렘이 (미국의) SF 팬덤에 대해 "이른바 '팬진fanzines'에 게재되는 독자들의 편지를 읽어보면 SF 창작은 변명에 불과한 경우가 많고, 실제로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좌절한 사람들의 상호 교류의 장場을 찾기 위한 시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며 독설을 퍼부었다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꽤나 씁쓸해했던게 생각난다. 이영도가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남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자신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에게서 백안시당하며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들 중에도 드물다."라는 문장도.

2. 絜矩之道 (대학)

대학 "윗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아랫사람에게 시키지 않으며, 아랫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윗사람을 섬기지 않으며, 앞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뒷사람을 이끌지 않으며, 뒷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앞사람을 따라하지 않으며, 오른쪽 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왼쪽 사람에게 건네지 않는" 태도를 줄여 이르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격언이 『대학』에만 나오는 말은 아니다. 아마 예수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7:12)라고 말한게 가장 유명하겠지만 이 역시 유대교 경전에서 내려오는 황금률을 예수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유학에서도 "나를 미루어 남을 헤아린다"(推己及人)거나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다"(己所不欲勿施於人) 등 유사한 격언들이 많이 나온다.

그래도 나는 '혈구지도'라는 말을 유독 좋아하는 편이다. 이는 이 네글자의 조어가 보편적 윤리인 황금률을 간명하게 잘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과는 다른 유학적 논리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혈구지도(絜矩之道)란 말에서 혈구(絜矩)란 목수들이 쓰는 곱자를 뜻하는 말이다. 곱자에 한번 그어진 눈금은 변하지 않는다. 같은 길이를 재는데 한번은 3cm로 나오고 또한번은 5cm로 나온다면 그게 제대로 된 곱자일리 없다. 3cm는 3cm일 뿐이다.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비유는 이런 곱자에 주목한다. 어떤 사안에 대한 판단 기준은, 일단 한번 정해진 이상 누구에게나 공정히 적용되어야 한다. 내 스스로에게 적용되는 바와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바가 같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보편적인 원리를 우리는 보편 윤리, 원칙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혈구지도라는 비유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자기 자신도 하지 못하면서, 혹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면, 애당초 제대로 된 주장이라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서양의 형식 논리학에서는 전형적인 '인신공격의 오류'로 지적되겠지만, 유학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 유학에서 주장과 실천은 함께 가야 한다고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접한 뒤로 나는 께름칙한 주장을 접하면 일단 그 주장의 논리 구조를 분석한 다음 과연 그러한 주장을 편 사람 자신은 그러한 논리에 충실한가를 따져보는 버릇이 생겼다. 당장 생각나는 예라면 예전에 커그에서 일어났었던 '재미 vs 가치' 논쟁에 달았던 댓글.

매번 같은 소리를 하게 됩니다만... 재미지상주의자들이 진정 짜증나는 건 그들이 주장하는게 취향의 평등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의 불평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는 주장의 기본 구조는 그들이 비판하는 이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어요. '내가 재밌어하는 건 인정받아야겠지만 네가 재밌어하는 건 인정 못하겠다'는 거죠. 어느 한 취향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위해 꼭 'XX한 것보다는...' 하는 식으로 다른 취향을 깎아내리곤 한다는게 문제죠. 평소에는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하며 약한 척 하다가도 기회만 있으면 팔레스타인을 피바다로 만들곤 하는 이스라엘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2009/01/24

최근에 이글루스 등지에서 일어났던 소위 '호모포비아 논쟁'이 우습기만 했던 것도 어느 정도는 이런 버릇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했던 호모포빅들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게이 혐오도 취향이니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달라"쯤이 된다. 듣고는 어이가 없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나는 게이를 혐오한다'라는 문장이 '나는 짜장면을 혐오한다'와 같은 선상에서 논의될만 하느냐, 호모포빅들이 요구하는 '표현의 자유'와 동성애자들이 요구해왔던 '표현의 자유'의 수위가 비교가능한가 등의 사안은 일단 제껴놓도록 하자. (이러한 문제는 다른 글에서 다룰 것이다) 이 글과 관련하여 나를 웃겼던 것은 그 잘난 '혐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정작 남들에게도 호모포빅 자신들을 혐오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줄여본다면 '나는 게이를 혐오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너는 그런 나를 혐오한다고 말할 수 없다' 쯤이 될까. 익명게시판에 흔해빠진 키보드 파이터들이 더 윤리적이겠다 싶어서 우습기만 했었다.

3. 誠於中 形於外(대학)

"내면이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내면의 인격이 외양에도 반영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경구에서 이야기하는 외양(外)이란 단순 외모만이 아니라 표정과 말씨, 몸가짐 등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잘생긴 사람은 성격도 좋고 못생긴 사람은 성격도 나쁘다는 식의 단순한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잘생겼냐 못생겼냐를 떠나서 한 사람의 행동 방식이 그 사람의 본질을 말해준다는 거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최근에 이 말을 곱씹을 기회가 생겼다. 정도원 선생님 수업이 종강하는 날 그 뒷풀이에서 정도원 선생님께서 나의 겉모습이 예전과 어떻게 달라졌으며 내 내면 또한 어떻게 달라졌는지 짚어주셨던 거다. 옷을 어떤 걸 입었고 안경을 어떤 걸 꼈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언변이 편해지고, 내 웃음이 예전보다 자연스러워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짚어주시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다시 한 번 '성어중 형어외'를 곱씹었었다.

'성어중 형어외'라는 말을 들으면 한 가지가 더 떠오른다. 여기부터는 거의 내 멋대로의 해석이다. 이 경구에 따르면 내면(中)이 변하면 밖(外)으로 드러나는 외양 또한 변한다. 그렇다면 그 달라진 외양을 접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평가 또한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경우에는 외양(形)이 中이 되고 타인과의 관계는 外가 된다. 결국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와 평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을 닦으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은 주머니를 뚫는다'는 말과도 통한다고 할까.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가 가진 것 이상의 평가를 얻어내려 억지를 쓴 경우가 참 많았다. 요즘 말로는 허세라고 하는 걸 텐데, 그리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특히 2006, 2007년에 썼던 글들은 대부분 허세의 반영이었다고 해도 좋다. 알건 모르건 어떻게든 끼어들어서 아는 척을 하고 잘난 사람이라고 인정받으려 했던 시절. 뭐, 그 허세의 결정체였던 '판작안'만 해도 결국에는 내가 더 많은 독서를 하고 더 많은 공부를 하는데 일조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것도 일종의 성장통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성장통이란 결국 언젠가는 끝나야 하기 마련이다.

"개념인으로 불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개념글을 쓰라. 개념글을 쓸 실력이 되지 못하는가? 개념글을 쓰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자기 발전을 하라. 그렇게 차근 차근 자기 내면을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기 마련이다." 이런게 요즘 내가 성어중 형어외를 곱씹으며 떠올리는 사고들이다.


4. 愼獨

'혼자 있어도 삼간다'는 말로, 주어를 붙여 군자신독(君子愼獨)이라고도 한다. 원칙을 세웠으면 남들이 보지 않을 때에도 그에 맞춰 행실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뜻이다. 신념과 원칙은 1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에, 정말 옳은 원칙을 세웠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2번에서 이야기한 황금률과 어느 정도 통하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마하는 '혼자다'(獨)라는 표현이 말 그대로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만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인터넷 게시판 상에서 익명을 써서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 이 또한 홀로 삼감에 대해 이야기할만한 상황 아닐까.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그렇지 않는데 디씨에서만 유독 말을 험하게 하는 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다. 디씨 자체가 상호하대를 원칙으로 하는 공간이다 보니 그쪽의 룰을 지키다 보면 어느 정도는 거기에 물들기 마련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요즘은 또 그렇지도 않은 듯 하지만 예전에 디씨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다른 커뮤니티의 '젊잖은' 게시판 문화를 두고 비꼬는 사람들이 많았다. 위선과 가식이 넘치는 공간이라는게 그네들 주장의 골자였다. 하지만 그렇게 솔직하다는 그네들 중에서, 디씨에서의 태도를 오프라인에서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타 게시판의 사람들을 위선적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사실은 그네들 자신이 위악적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내가 디씨에서도 평소의 어조를 버리지 않으려 하는 것도 이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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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결산

일기/잡담 2010/01/04 17:40
예전에 보라님 블로그에서 봤던 형식의 글 포스팅. 원래 제목은 '올해 결산'이니까 작년에 했어야 맞는 글이다.

올해의 나: Seperation Anxiety + Wind Blows. 그렇게 어두운 해는 아니었지만. 변화와 발전을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바랐던 해이자 많은 이들을 떠나보내고, 그들을 가슴 속에 묻어야 하는 한해였다. 물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올해의 키워드: 신!


올해의 별명: 그런거 엇ㅂ다. 아프락사스는 아프락사스고, 최진석은 최진석일 뿐.


올해의 관심사: SF. 지난 해에 비하면 SF소설을 꽤 많이 읽은 해였다. 2009년에 읽은 책 96권 중 27권이 SF 관련 서적일 정도였으니. 2008년의 93권 중 고작 6권이 SF 관련 서적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늘어난 셈이다.


올해의 드라마: 그런거 엇ㅂ다.(2) 원래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올해의 영화: 《다크 나이트》.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영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올해는 많이 본 편이라 《다크 나이트》, 《반두비》, 《나인》, 《아바타》의 네 편. 《다크 나이트》를 제외하곤 만족스럽게 본 영화가 하나도 없다. 자연스럽게 《다크 나이트》확정.


올해의 버라이어티:  《도전! FAT 제로》(The Biggest Looser). 십수명의 도전자들이 나와서 몇 주에 걸쳐 살을 빼는 프로그램. 프로그램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변하는 외모도 외모지만 삶에 대한 도전자들의 태도가 변하는 과정을 보는 것은 참 즐겁다. 일종의 대리만족도 되고. 물론 가장 즐거운건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벌어지는 피튀기는 신경전!


올해의 책: 『거장과 마르가리타』. 2009년에 나왔던 '신간'으로 한정한다면 할 말이 별로 없다. '2009년에 읽은 책'으로 범위를 넓힌다면 들만한 책은 『어둠의 속도』와 『거장과 마르가리타』. 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어둠의 속도』에서 더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2009년을 상징하는 책이라 하면 단연 『거장과 마르가리타』 쪽이다. 말하기 민망한 동기에서 읽기 시작했으되,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읽은 책도 드물다. 특히 스무살 넘어서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2009년에 읽은 책 참고. 


올해의 음반: 오지은 1,2집/언니네 이발관 5집. 어느 하나만 꼽을 수 없어 고민 끝에 세개 다 올렸다.


올해의 전자제품: 지금 쓰는 넷북. 그러나 2010년에는 처분해버리고 데스크탑으로 바꿀 생각이다. 외출하면서까지 컴퓨터를 들고 다니니까 사람이 못쓰게 변한다.


올해의 패션: 돈지랄. 서울 올라오면서부터 꽤 많은 돈을 옷사는데 썼다. 예전에 입은 옷들은 도저히 다시 입을 수 없어, 날이 바뀔 때마다 옷을 죄다 새로 사야 했기 때문이다. 이걸 두고 동아리에서는 사람이 바뀌었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며 호들갑이었으나 나로서는 그저 재미있을 뿐이었다. 하기사 예전같으면 절대 내 돈 주고 옷을 사진 않았을 테니 변하기는 했다.


올해의 음식: 스타우트 흑맥주. 서울 올라와서 가장 많이 사마신 술이다. 내년에는 Johnnie Walker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올해의 화장품: 그런거 엇ㅂ다.(3)


올해의 선물: 『유년기의 끝』. 유로스님이 빌려주셨다. 읽고 나서 아서 클라크에 대한 못된 편견을 가졌던 걸 깊이 반성했다. 오오 클라크 오오.


올해의 팬시: 생일 즈음하여 샀던 가방. 나는 별로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주변에서 좋다고 말해주는 이들이 많다.


올해의 차 : 부산에서 마셨던 얼 그레이. 여태 에스프레소 커피만 마셔대던 걸 깊이 반성하였다.


올해의 과자 : 그런거 엇ㅂ다.(4) 원래 단걸 별로 안좋아한다.


올해의 보석 : 그런거 엇ㅂ다.(4)


올해의 사이트: BookSea. 처음에는 거울을 생각했었지만, 올해의 '사이트'로서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 북시 위키로 바꿨다. 내게 거울은 오프라인으로서, 현실에서 장르문학 이야기르 나눌 수 있는 곳으로서의 의미가 더 큰 공간이다. 그 거울을 제외한다면 꼽을만한 곳은 당연히 북시 위키 뿐이다. 장르문학 팬으로서의 '아프락사스'를 상징하니까. 앞으로는 과연 얼마나 더 충실히 운영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렇다.


올해의 상점: 교보문고 바로드림 서비스. 작년에 같은 설문을 했다면 아마 '알라딘'을 뽑았을 텐데, 올해는 교보문고다. 서울 올라온 뒤로는 바로드림 서비스로 광화문점을 정말 뻔질나게 드나들었었다. 교보문고는 언제 가도 즐겁다. 내년에는 아마 풀무질 서점을 뽑지 않을까 싶다. 학교 앞의 작은 서점인데, 갈 때마다 책장에 진열된 책들을 보며 탄복하게 된다. 소규모 서점은 주인의 심미안에 따라 그 풍경이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이라, 가끔은 이런 탁월한 예도 발견된다. 

올해의 성취: 거울 필진 된 거?


올해의 남들은 다 좋다는데 나 혼자 별로: 배명훈. 싫어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가 누리는 인기는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많다. 『타워』출간 이후 이런저런 이벤트에 불려다니며 소모당하셔야 했는데, 2010년에는 좀 더 작품 활동에 집중해주셨으면 좋겠다.


올해의 남들은 그냥 그렇다는데 나 혼자 열광: 그런 범주에 들어가는 건 『거장과 마르가리타』밖에 없다. 그래서 나로 인해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을 말하면 상당히 미안해진다.


내년의 소원: 학교 수업이 더 재밌어졌으면 좋겠다한국유학사 시험 시간에 Issac Asimov니 Master & Margarita니 하는 단어만 깨작이다 나오지 않을 수 있게. 문학 복전이 새 돌파구가 되어줄까?

내년의 여러분에게: 장담하지요. 2010년이 먼 과거가 되어버린 어느 시점까지도 나는 2010년의 오늘과 여러분을 생각할 겁니다. 지금의 내가 안은 숱한 미숙함과 어설픔, 단점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남아준 그대들을 그리워하겠지요. 그러니 미리 말하겠습니다. 나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당신들은 내게 참으로 소중한 벗들이라고.


내년의 나에게: 어제보다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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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목)
  • 10시쯤 PC방에서 나서 근처의 충렬사에 들렀다. 송상현 장군이 모셔진 곳이라는 건 들어서 알았으나 얼핏 절(寺)이려나 싶었는데, 가서 현판을 보니 사당(祠)이었다. 정식 명칭은 동래 충렬사(東萊忠烈祠). 평일 오전이다 보니 관광객이라고는 거의 나 혼자였다. 그 외 보였던 사람이라면 산책하러 나온 할머니 한 분과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 알 수 없는 군인 1개 소대 정도. 그러다 보니 한적한 사당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새소리와 더불어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날씨가 조금만 따뜻했다면, 혹은 목도리와 장갑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좀 더 머물다 나왔을 것이다.
     
    나온 후에는 마땅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해서 해운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갈만한 여행지야 여러 곳을 들었으나 경치 보는 눈이 시원찮은 나로서는 명소라 한들 딱히 마음에 차지 않을 듯 싶었으므로, 차라리 생전 처음보는 동네나 좀 거닐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무작정 걸었다. 중간에 무슨 골목길에 빠져드는 바람에 길을 좀 해매긴 했으나 다행히 동사무소 건물을 발견해서는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후로는 걷기 걷기 또 걷기. 대략 3시간에 걸쳐 7,8km쯤 걸은 듯 싶다. 그로 인한 감상은... 음. 부산은 어딜 가나 산을 볼 수 있는 도시이며, 산 중턱에도 아파트를 지어놓는 근성 넘치는 도시라는 것 정도. 홈플러스에서 점심을 먹던 와중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오길래 받았더니 진아가 또 쓰러져셔 입원했다고 했다.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불행중 다행히 남자친구와 만나러 가다 일이 생긴 탓에 빠르게 대처를 했다는 모양이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아의 병세가 생각 외로 심각한 듯 했다. 하여 아버지도 광주에 내려오시기로 했다 하고... 나 역시 광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해운대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에 가기 위해서는 일단 대전까지 가야 했고... 오후 3시 반에 해운대에서 출발한 내가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음날 새벽 2시였다. 광주행 열차는 그나마도 막차였던 탓에 미칠듯이 사람이 많았다. 차 안에서 『낯선 조류』를 마저 읽었다. 그 뒤에 하릴 없이 핸드폰 게임이나 하다가 문득 앞을 보니 왠 청년이 양장본으로 된 『논어』를 읽고 있었다. 내심 반가웠어도 차마 아는 척 하질 못했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제목을 확인해보니 김용옥의 『논어한글역주』인듯 싶었다. 기분이 참으로 복잡했다.

12월 26~30일

12월 21~25일

12월 16~20일

12월 11~15일

12월 06~10일

12월 01~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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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오랫동안 방치된 블로그긴 하지만, 그래도 신고는 해야겠지요. 12월 28일부터 1월 3일까지 기차 여행을 다녀올 생각입니다. 동행은 없고, 혼자 가는 여행이지요. 목적지나 일정은 따로 없습니다. 기차를 타는 것 자체가 더 주된 목적이지요. 책이나 그득 짊어지고 가서 읽으며 돌아다닐 생각이에요. 봐야 할 영화, 써야 할 글이 몇 편 있어서 넷북을 들고 가기야 하겠지만 인터넷을 쓸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결국 1주일 정도는 새로 업데이트되는 글이 없다고 봐야죠.

그럼, 나중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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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한국문학계의 거물 출판사인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입니다. 세계문학전집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자기네 출판사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총서는 본래 문지가 아니라, 교보그룹 창업주인 대산 신용호 회장이 세운 대산문화재단에서 기획한 전집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일개 출판사가 아니라 교보생명이라는 거대 기업을 등에 업은 문화 재단에서 공익 사업으로 내는 문학 총서인 셈이죠. 실제로 출판계에서 번역자에 대한 대우를 가장 후하게 쳐주는 기획물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이에 견줄만한 기획물이라면 국가기관인 학진에서 지원하는 《한국학술진흥재단 고전명저번역총서》정도?

기획 자체도 공모 형식으로 한다는게 재미있는 점이죠. 즉 번역자들이 이러이러한 작품을 번역하고 싶다고 응모를 해오면 심사를 해서 그 중에 선정을 해 번역을 의뢰합니다. 이렇다 보니 번역에 들어가는 공 자체도 타 출판사의 판본과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인 것이죠. 이를테면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경우 이 총서 외에도 열린책들의 홍대화역이나 문예출판사의 박형규 역이 존재합니다만, 작가인 미하일 불가코프의 작품을 전공한 사람이 맡은 판본은 이 총서의 김혜란 역이 유일합니다. 주석을 비롯한 곁다리 자료들만 봐도 번역에 들어간 공력이 엄청나게 차이난다는걸 알 수 있죠.

그렇다면 문제가 뭔고 하니... 이 전집의 기본 명작이 '문학사적 가치가 있으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고전 명작'에 대한 소개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지요. 물론 의의가 깊은 일이기야 한데, 덕분에 일반 독자들 입장에서는 워낙 생소한 작품이 많습니다. 그만큼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기도 어렵고요. 이 총서의 책들 대부분이 워낙에 안팔리는 것도 아마 그런 사정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문학에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언젠가는 이 총서를 한번쯤 접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외에... 초기작에서는 이 총서가 흰색 표지에 제목만 덜렁 달아놓은, 무척 촌스러운 장정을 했었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새로 나온 책들은 무척 깔끔하고 보기 좋은 장정으로 바뀌었더군요.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얼마 전부터 나오기 시작한 전집인데... 사실 저는 접해본 바가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유명 소설가 김영하에게 번역을 의뢰하는 등 이리저리 애를 쓰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 같은 출판사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소설가 김연수에게 번역하게 했던게 생각나서 좀 재밌었습니다 - 좀 더 두고 볼 일이지요. 『파우스트』처럼 예전에 같은 출판사에서 좀 더 고급스러운 장정으로 나왔던 책을 전집에 편입시킨 경우도 있던데, 기왕 나왔던 책은 어떻게 될런지 좀 걱정되는게 사실입니다.


민음 세계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의 베스트셀러. 가장 널리 팔리는 전집이죠. 도서 관련 커뮤니티에서 번역본에 관련한 질문만 들어오면 무조건적으로 이 전집을 추천하는 광경도 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전집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워낙 많이 팔리는 전집이다 보니 부정적인 반응도 그만큼이나 많이 나오는 거겠지요.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은게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이른바 '세계명작' 즉 너무 잘 알려지다 못해 뻔하기까지 한 작품이 워낙 많다는 것이죠. 무려 200권이나 넘어가는 문학전집이고 보니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가끔은 불만스러울 때도 있지요.

게다가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는 번역... 물론 문학전집의 특성상 좋은 번역도 있고 나쁜 번역도 있기 마련입니다만 민음사의 경우는 사실 그리 곱게 보이지 않더군요. 업계 매출 1,2위를 다투는 대형 출판사이면서도 역자에 대한 대우가 워낙 박하기로 유명해서, 마냥 번역자만 욕하기도 뭐하다는 게 가장 크지요. 왕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그대로 가져와 출간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특히 『중국신화전설』 같은 경우는 《대우학술총서》로 나왔던 책을 다시 내면서 주석과 본문 일부를 뚝 떼어먹었기로 유명합니다. 이런 판단을 설마 번역자 혼자서 했을리는 없죠. 소위 '보급판'이라는 미명 아래 출판사 측에서 저지른 짓이라고 봐야 할 텐데, 그런 황당한 사건을 목도하고 나면 사실 이 전집이 그렇게 곱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뭐, 그렇다곤 해도 이 전집만의 장점도 있습니다. 일단 200권을 넘어가는 방대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전집이다 보니 작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에 좋고, 뭣보다 가격이 엄청나게 싸거든요. 정가조차 7,000원밖에 안하는 책도 상당히 많습니다. 인터넷 서점으로 주문하면 한 권에 5,000원이 안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이래저래 주머니 사정 어려운 독자들에게는 그럭저럭 괜찮은 선택이라 할까요.


 《범우 비평판 세계 문학선

왕년에 많이들 봤던 세계문학전집. '훌륭한 작품을 양질의 번역에 싼 값으로 공급한다'라는 컨셉을 내세웠던 전집이고, 딴에는 《Mr.Know 세계문학》의 선배격(?)인 전집이기도 합니다. 이 전집으로 나왔던 번역서 중 김붕구의 『적과 흑』 번역을 비평가 김현이 제법 호평했던게 기억에 남는군요. 이 외에도 한쪽 눈의 시력을 잃으면서까지 연구에 몰두했다는 전설로 유명한 영문학자 김병철 선생도 이 출판사의 매니아로 유명했고... 다만 이 전집 자체는 워낙 구닥다리가 되어놔서 지금에 와서는 별로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취향 자체가 좀 옛스러운(?) 분들이 주로 찾으시죠. 게다가 『샤를마뉴 황제의 전설』처럼 여전히 이 전집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도 여럿 되니 아주 무시해버리기엔 아까운 전집입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Mr.Know 세계문학

얼마 전에 제가 이 전집에 대한 정보를 올렸었는데... 《Mr.Know 세계문학》이 《열린책들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왔습니다. 글자 크기나 행간 등은 그대로고 표지와 가격만 바뀌었다더군요. 물론 전집의 라인업도 다소 달라지긴 했습니다. 원래 전집으로 내질 않았던 『미사고의 숲』같은 소설이 새로 전집에 포함되었고, 열린책들의 베스트셀러라 할 도끼 소설들도 여럿 포함되었죠. 아예 새로 번역된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만 이거야 두고 볼 일이죠. 다만... 기존에 단권이나 두권 분량으로 냈던 책을 두 권 내지 세 권으로 추가 분권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가뜩이나 양장으로 바뀌면서 오른 책값이 훨씬 더 올랐습니다. 열린책들이 정말로 저가정책을 포기했구나 싶어서 영 씁쓸했더랬죠.

뭐 늦은 말이긴 합니다만 《Mr.Know 세계문학》은 흔해빠진 세계문학전집 중에서도 자기 색을 갖춘, 상당히 괜찮은 문학전집이었더랬죠. 출판사 자체가 초기부터 '관련 언어 전공자에 의한 완역본'을 컨셉으로 밀고 다녔던 곳이기도 하고, 전집의 라인업 또한 기존의 전집들에 비하면 상당히 참신한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장르문학 팬덤에게는 SF나 판타지 장르에 속하는 작품들이 '세계문학전집'의 작품으로 소개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의미 깊은 일이었죠. 이 외에 비교적 최근에 나온 작품을 소개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해서, '고전'에 질린 독자들이 보기에는 그래도 썩 괜찮은 전집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열린책들에서 나오는 번역서 특유의 희안망측한 고유명사 표기(특히 러시아문학)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못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열린책들이 워낙에 판본 장난을 잘 쳐서 그렇지 전집 자체는 제법 쓸만하다는 이야기지요.


 《월드북

동서문화사에서 내는 책인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런 책이 여전히 시장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일 아닐까 합니다. 물론 동서문화사가 한창 활약하던 시절(그러니까 사상계사의 뒤를 이어 동인문학상을 인수하던 시절)에는 이 출판사에서 내는 중역본들도 나름의 의의가 있었습니다. 워낙 책이 부족하던 시절이니까요. 이 출판사에서 냈던 《ACE88》등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많은 것도 그런 사정 때문 아니었겠습니까? 중역본이니 완역본이니 하는걸 따지기 이전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지금이야 굳이 번역도 이상한 이 출판사의 책을 사서 볼 필요가 없습니다. 보다 훌륭한 번역서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싸다곤 해도 이런 책을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 출판사 자체도 좀 이상한 소문이 많이 들리던 곳이죠. 90년대에 백과사전을 출간하면서 직원들을 사정없이 착취했다는 둥... 이 출판사 사장이 보여온 정치적 행보도 영 못미더운게 사실입니다.


 《을유세계문학전집

출판사의 나이로 따지면 범우사(1966~)보다도 훨씬 오래된 을유문화사(1945~)의 전집. 얼핏 기억하기로 이 전집 이전에도 을유문화사에서 낸 전집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질 않는군요. 여튼 지금 소개하는 전집 자체는 2008년에 출간되기 시작한 전집입니다. 사실 저로서도 이 문서 준비하면서 새삼스럽게 기억했다 뿐 직접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는 전집인데... 찾아보니 출판사에서 50년만에 다시 시작하는 전집이라는군요. 그만큼 출판사에서도 나름 정성을 기울였던 모양인데, 물론 저는 직접 읽어본 바가 없으니 평가야 생략. 다만 최근에 크래티앵 드 트루아의 『그라알 이야기』를 내놓은 건 굉장히 이채롭더군요. 번역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책인데 나와줘서 굉장히 기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참 묘했더랬습니다. 좌우간 귀추를 주목해볼만한 전집이라는 점은 확실하지요.


 《펭귄 클래식

세계적으로 유명한 '펭귄 클래식' 전집의 한국어판이긴 한데... 그 모양새가 좀 이상합니다. 본래 펭귄 클래식은 저작권이 풀린 고전들을 - 모양새를 포기하는 대신 - 염가에 판매한다는 기획을 내세웠던 전집이지요. 책을 서점이 아닌 슈퍼마켓에서 판다는 판매 전략을 최초로 도입했던 전집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국어판은 요게 '값이 싼 것도 아니오 장정이 고급스러운 것도 아닌' 요상한 꼴이 되었습니다. 펭귄 클래식 답지 않은 고급화 전략을 꾀하면서도 그게 좀 어설프게 되었달까요. 저도 읽어본 게 얼마 없어서 판단은 보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겉모양새만 보면 어째 찜찜... 한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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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건!


...and Gate for stairway To Heaven

50번의 시도 중에 3번만 성공했다는 광고. 
저 험지를 물흐르듯 내려오는 카메라, 배경음악, 로버트 칼라일의 발음. 모든 게 완벽하다!


...그리고 오늘 학교에서 만난 후배에게 저 술의 감상을 이야기했더니 돌아오는 코멘트 :

"선배가 그렇게 행복하게 웃는 표정은 두세달만에 처음 봐요."


오오라, 그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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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

일기/잡담 2009/12/08 14:02



이런 걸로 검색해서 들어오는 놈이! 

그것도 두 번씩이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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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Know 세계 문학 전집의 위엄(일부).


어딜 가나 그놈의 '루저 드립' 투성이다. 미수다 출연자들을 조롱하는 글에서부터 그런 남성들을 꾸짖는 글에까지. 진짜 말 그대로 '어딜 가나' 그런 이야기 투성이다 보니까 이젠 누구를 까는 글이건간에 말 그대로 '루ㅈ'만 봐도 화가 치밀어오를 지경이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다) 이러니 정말 블로그, 미투데이, 북시 등 몇 개 사이트를 제외하면 정말 갈데가 없다.

하릴없이 카이사루저니 '웨인 루저'니 하는 지랄같은 개드립이나 쳐대는 애들이야 뭐 별 수 없다 치더라도 심지어 일반 언론에서까지 - 물론 스포츠신문을 '언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 별 관계도 없는 기사에 '루저' 떡밥을 들이대는 건 대체... 이 떡밥이 정말 장기화되면 결국 나도 '근황'에나 몇 마디 끄적이는 수준을 넘어 아예 포스팅을 쓰지 않을까 싶지만 이슈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싫다. '키 작아서 싫다'는 소리 하나 들었다고 역겨운 꼴들을 작작 좀 보여줘야지.

현재로서는 당분간은 RSS도 켜지 말고 위키나 들여다보거나, 아니면 컴퓨터를 끄고 책이나 읽어야 할 모양이다. 마침 Mr.Know 세계 문학 전집 반값 이벤트 때문에 볼 책이 와장창 늘어나기도 했으니까. 약간 신경만 써주면 되는 일이다.

P.S.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글을 쓴 뒤에도 이상한 떡밥에 욱해서 또 반응해버린 걸 보면 나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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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시 반쯤 호스팅 업체와의 연락을 최종 마무리했습니다. 지난달 31일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 4일 오후에야 확답을 들은 셈입니다. 주말이 꼈다는 걸 감안해도 이 정도면 상당히 오래 걸린 편이죠. 여하튼...

호스팅 업체의 말에 따르면 그 쪽에서는 매주 일요일 오전에 데이터 백업을 하고, 그 전에 백업했던 자료는 파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북시 위키의 자료를 날린 건 토요일 새벽. 그 때는 업체에서 근무하지 않을 때라 내버려뒀더니 주말 사이에 호스팅 업체에서 가진 자료도 파기되었다는 이야기죠.

간단히 줄여보죠. 북시 위키의 자료는 완전히 파기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약간의 정비를 거쳐 목요일이나 금요일쯤 재개장할 생각입니다. 그 때부터 복구(=노가다) 작업 들어가는 거죠.

뭐... 딴에는 잘 된 일이기도 합니다. 의존하던 호스팅 업체의 서비스 수준이 얼마나 막장인지 깨달았으니까요. (호스팅 업체는 교체했습니다. 바꾸니 좋더군요.) 더군다나 북시 위키의 자료 '842건' 중 사실사 절반 가까이는 별 의미가 없는 자료들이었거든요. 보는 사람도 없고 내용도 부실한 자료들로 숫자만 채워둔게 워낙 많았으니, 딴에는 북시 위키에 깃든 거품을 뺄 기회가 된 셈이지요.

주소는 booksea.pe.kr 로, 예전과 동일합니다. 다만 현재는 접속이 되지 않습니다.

P.S.

아울러, 혹시 과거 북시 위키에 올라왔던 자료를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계셨던 분은 제보 부탁드립니다. 단 한 건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특히나 '앤솔러지' 항목 같은 자료는 굉장히 소중하죠. 자료 알려주시는 분께는 개인적으로 식사든 술이든 사례하겠습니다.

e-mail : gkman1@hanmail.net
msn : gkman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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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토)
  • 새벽에 북시 위키의 미디어위키 엔진을 업데이트하다가 위키 자료 자체를 모조리 날려먹는 사고를 내버렸다. 현재는 위키에 접속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물론 FTP에는 로그인이 되지만 그 방면에는 일자무식인지라 접속이 된다 한들 방법이 없다. 딴에는 백업을 해놓는다고 해놨었지만 그마저도 먹히지 않는 걸 보면 애시당초 백업이 잘 되지 않았던 모양이고... 일단 호스팅 업체 측에 문의는 해놨지만 복구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리라고 생각한다. 1년 반 넘게 축적되었던 842건의 자료도 이대로 소실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물론 말이 840여 건이지 1문단 이상의 분량인 문서조차 대략 500여 건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항목 수 자체는 빠르게 회복되리라고 생각한다. 외부에서 가져온 자료나 반대로 외부에 뿌린 자료도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문제는 직접 모으거나 번역했던 자료들. 이 역시 대부분은 원본을 남겨두지 않은지라 예전에 했던 작업을 모조리 반복해야 한다. 생각만으로도 입에서 쓴물이 날 지경이다. 뭐 딴에는 이번 사건으로 좋은 교훈을 얻은 셈이기야 한데...
     
  • 아침에 본 '네이트 오늘의 운세'가 결국 나를 웃겼다.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날이다. 대충대충 처리한 일이 뒷날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 하나하나 따져보고 살펴보고 깊게 생각하라. 직접 만나 처리하는 것보다 전화통화로 처리한 일이 더 쉽게 끝날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하면 좋을지, 정확하게 따져보고 판단하여 행동하길 바란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어렵고 힘들게 할 필요는 없다. 금전적인 지출이 있다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하고 너무 아까워하지 말라. 헛되게 썼다고 생각하고 아까워한 돈이 언젠가 쓸모 있게, 더 많은 이득을 부를 수 있다. 쓸 때는 기분 좋게 쓰자.
     
    공짜로 보는 운세 치고는 쓸데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그리고 늦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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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시 위키의 자료가 모조리 소실되었다. 위키에 사용중이던 미디어위키 엔진을 업데이트하려다가 생긴 사고다. 백업된 자료 전무. 유효한 내용을 담은 항목 수만 842건에 '넘겨주기' 등 특수 기능 문서까지 포함하면 근 1600건에 달하는 문서들을 모조리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약 19개월에 달하는 수고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고 해도 좋다.

끝내주는 밤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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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레 '2009년 10월 근황'에 넣으려다가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밖에 뺀 이야기-.

홍대화의 열린책들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끼워넣었다. 번역서 본문을 비교하는 대목부터 읽으면 된다.




내가 가장 먼저 접한 『거장과 마르가리타』 판본은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박형규 씨의 번역본이었다. 이 판본에 대해서는 읽기 전부터도 여러 곳에서 많이 들었다. 역자 박형규 씨는 과거 1982년부터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번역하여 출간했던 사람이다 운운. 이 번역본이 여러 출판사를 거쳐 1992년에 삼성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을 마지막으로 거의 14년간은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새 번역본이 없다가 2005년에 러시아에서 나온 드라마가 그야말로 대박을 치는 바람에 이 드라마가 한국에 수입되는 시점에 즈음하여 문예출판사에서 재출간되게 되었다 운운. 거개는 벌거지님을 통해 접했던 정보들이다.

가장 최근에 들었던 정보 중에는 이 번역본이 사실은 저작권 관련 사항조차 불명확한 일어 중역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 이야기 관련해서는 내 기억이 불확실하니 넘기도록 하고... 중역본들이 대개 그렇듯 매끄럽게 읽히는데 치중한 번역본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사실 이 판본으로 읽을 때만 하더라도 그게 무슨 소린가 했었는데, 불가코프 전공자가 작업한 다른 번역본들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확실히 그렇게 충실하다고는 보기 어려운 번역본이다. 2권 말미에 들어간 벌거지님의 서평은 꽤 훌륭했지만 번역에 들어간 정성 자체가 이리 부실해서야.

그 뒤에 접한 판본은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나온 김혜란의 번역본, 그리고 열린책들에서 나온 홍대화의 번역본. 뒤의 두 판본은 이전에 나온 문예출판사 판에 비하면 정말 정성스럽게 제작된 판본이라 그저 감탄하면서 볼 뿐이다. 요 며칠간 나도 해외의 불가코프 팬 사이트를 뒤지며 나름 공부를 하긴 했다지만 이 두 사람의 번역서에 달린 주석들은 상당 부분 나로서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것도 작품 이해에는 거의 필수적인 주석들이어서, 문예출판사 판만 봤다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이를테면 2장에서 예슈아 하-노츠리가 유다 이스카리옷과의 인연을 설명하는 부분을 보자.

 박형규 역(45~46p, 1권)  김혜란 역(44~45p)  홍대화(49~50p, 上권)
  "그럼," 총독이 말했다. "이 질문에 대답해봐라. 가리옷 사람 유다를 아느냐? 그와 얘기한 적이 있다면, 케사르에 대하여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있습니다." 죄수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저께 저녁 저는 성전 근처 가리옷 마을에서 온 유다라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집으로 초대하여 저녁 식사를 같이했습니다."
  "그는 선량한 사람인가?" 빌라도가 묘한 눈빛을 띄고 물었다.
 "매우 선량하며,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죄수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는 저의 사상에 커다란 관심을 나타냈으며 즐거이 저를 환영했습니다."
 "촛불까지 켜고……." 빌라도가 이를 악문 채로 죄수에게 말했다. 그의 눈이 번득였다.
  "예." 예슈아는 총독이 그토록 소상한 것까지 잘 알고 있는 데 놀라면서 말했다." 그는 저에게 정부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는 그 문제에 대단히 관심이 많더군요."
  "그래서 너는 무슨 말을 했느냐?" 빌라도가 물었다. 
 "아니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잊어버렸다고 대답하려느냐?" 그러나 이미 빌라도의 목소리에는 체념한 듯한 기분이 나타났다. 
  "그럼," 그가 말했다. "이 질문에 대답해봐라. 너는 키리아트에서 온 유다라는 자를 알고 있느냐, 그리고 그자에게, 그러니까 만일 말을 했다면, 카이사르에 대한 무슨 말인가를 했느냐?"
 "그 일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죄수는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엊그제 저녁 성전 옆에서 키리아트 시에서 온 유다라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도시 남쪽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저를 초대하여 대접해주었습니다……."
 "그자도 선량한 사람이었겠지?" 빌라도가 물었다. 그의 눈에 불꽃이 타오르듯이  이글거렸다.
 "무척 선량하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죄수가 대답했다. "그는 제 생각에 아주 큰 관심을 보였고, 매우 정성스럽게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작은 불꽃들도 켜두었고……." 빌라도는 거의 입을 벌리지 않고 죄수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두 눈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그렇습니다." 예슈아는 총독이 그 사실을 벌써 알고 있다는 것에 다소 놀라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국가 권력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문제에 무척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나?" 빌라도가 물었다. "아니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할 텐가?" 빌라도의 어조에는 이미 절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 대답해라.」 그는 말했다. 「너는 기리앗 출신의 유다38라는 자를 아느냐? 말한 적이 있다면, 네가 카이사르에 대해 한 말은 참으로 어떠한 것이냐?」
 「일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죄수는 기꺼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저께 저녁 나는 기리앗 출신의 유다라고 하는 한 젊은이를 성전 옆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를 도시 아래쪽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대접했지요…….」
 「그는 선한 사람이냐?」 빌라도가 물었다. 그의 눈빛에서 악마 같은 불꽃이 튀었다.
 「아주 선량하고 상냥한 사람이지요.」 죄수는 맞장구를 쳤다. 「그는 나의 생각에 큰 관심을 보이고, 나를 아주 정성스럽게 맞이했습니다…….」
 「등불을 밝혔겠지…….」39 빌라도는 이를 악물고 죄수의 톤에 맞추어 말했다. 이때 그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렇습니다.」 총독이 그것을 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라면서 예슈아가 말을 이었다. 「나에게 국가 권력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말해 달라고 했어요 그는 그 문제에 지극한 관심을 보였지요.」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느냐?」 빌라도가 물었다.
 「혹은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다고 하려느냐?」 그러나 이미 빌라도의 말투에는 기대감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촛불', 혹은 '불꽃'에 대한 묘사이다. 사실 이 부분은 다소 생뚱맞게 삽입된 부분이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총독이 대체 어떻게 그 자리에서 불을 켰다는 사실을 짐작한단 말인가? 별다른 주석을 제시하지 않는 박형규 역에서는 이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만, 김혜란 역과 홍대화 역에서는 미주와 각주를 통해 이렇게 설명한다.

『탈무드』에 따르면, 유대의 율법은 누군가 종교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유혹'의 죄로 고소된 경우, 두 증인으로 하여금 벽 뒤에서 숨어 지켜보게 하고, 그 옆방에 피고인을 들어가게 하여, 피고인이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증인들이 그의 말을 듣게 했다. 그리고 이 때 피고인 곁에는 촛불 두 개를 켜두어, 증인들이 피고인의 얼굴을 분명히 알아보도록 했다. (김혜란, 619p)

로마법에 따르면 숨겨 놓은 증인들이 범인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등불을 밝히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홍대화, 상권 50p)

유다가 예수를 초대하면서 촛불을 켰다는 사실은 결국 이 때 이미 유다가 예슈아 하-노츠리(곧 예수)를 팔아넘기고자 했다는 뜻이고, 본디오 빌라도가 이에 대해 먼저 언급했다는 건 그러한 사실을 본디오 빌라도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뜻한다. 주석이 없는 다른 판본에서는, 본인이 이에 대한 배경지식을 갖추지 않은 이상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대목이다.

기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저자 자신이 살았던 당대, 스탈린 정권 치하의 러시아에 대한 풍자 소설일 뿐만 아니라 성경, 중세 파우스트 전설 등 숱한 배경지식들이 녹아난 소설이기도 하다. 결국 작품들이 품고 있는 맥락들을 집어내지 못한다면 작품의 가치를 온전히 느끼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러한 충실한 주석이 곁들여진 번역본들의 가치가 단연 높을 수밖에 없다.

남은 문제라면 기왕에 나온 두 주석본 중 어떤 책의 주석이 더 탁월하느냐의 여부가 되겠는데... 사실 가리기가 쉽지 않다. 인용한 구절에서는 김혜란 역의 주석이 훨씬 상세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홍대화 역에서 훨씬 상세하거나, 아예 홍대화 역에만 실린 주석도 적지 않다. 정말 재미있는 건, 두 번역본 모두 같은 원서와 같은 주석서를 참고하여 주석을 달았다는 점이다. (1990년에 출간된 불가코프 전집과 2007년에 출간된 벨로브롭체바의 주석서) 일단 쉽게 확인 가능한 차이라면 문학과지성사판은 주석을 미주로 달아 죄다 책 뒤로 밀어냈고, 열린책들판은 각주로 달아 그 때 그 때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는 점 정도.

물론 열린책들에서 나오는 러시아문학 특유의 독자적인(?) 인명 표기는 좀 더 생각을 해야 할 부분이고...

결국 문예출판사의 번역본을 까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는데, 사실 그 번역본도 나름 번역사에서 의미가 없지는 않다. 일단 2006년에 이 번역본이 재간되고 나서 최근 들어 갑자기 문학과지성사판이니 열린책들판이니 하는게 번역되기 시작했고, 모 출판사에도 번역 원고가 넘어갔다고는 하니 말이다. 번역 자체의 수준이야 어떻든 불가코프 번역 붐(?)을 일으킨 공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할까? 그렇다곤 해도 문예출판사의 번역본만 보겠다고 하면 썩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또, 아직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모 출판사에도 2007년에 번역 원고가 넘어갔다고 들었다. 언제 나올지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번역자 분이 소설가로서는 내 나름 주목하는 분이기도 해서 제법 궁금하게 생각하는 중이다. 원고가 2007년에 넘어갔다 하니 문학과지성사나 열린책들에서 나온 원고보다는 주석이 상세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뭐 모 출판사에서 현직 교수인 이상섭 씨가 번역한 『아서 왕의 죽음』조차 2005년에 원고를 받아놓고서는 올해 말에 낸다니 만다니 하는 상황이라는 걸 감안하면 과연 언제 나올지 궁금할 따름이다.
Posted by 아프락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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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판타지 팬덤 생활에 대한 회고」라는 글을 썼었다. 따로 공개했던 적은 없고, 그냥 나 혼자 보기 위해 썼던 글이다. 제목이야 판타지 팬덤 운운이지만 실은 내가 이제껏 몸담아왔던 인터넷 커뮤니티 거의 대부분에 대한 글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반 도서 커뮤니티인 '도서 갤러리' 정도를 제외하면 내가 소속감을 느낄 정도의 애착을 보였던 커뮤니티는 모두가 장르문학 커뮤니티였으므로. 쓴 나도 종종 내용을 잊어버릴 때가 많은「작가들에 대한 가쉽」정도를 제외하면 예전 글을 잘 뒤져보지 않는 성격이지만, 요즘 하도 험한 꼴을 많이 당해서 그냥 일부러 찾아봤더랬다.

문제는 제게 좋은 '후원자'는 있었을 지언정 좋은 '조언자'는 없었다는 겁니다. 주변의 친구들 중에는 독서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어른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당시 기껏 중학교 1학년에 불과했던 제가 독서 일정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 스스로 통제해야 했다는 거죠. 좋고 나쁜 걸 구분하기이전에 어떤 책이 존재하느냐의 여부도 잘 모르는 소년이 뭘 알겠습니까. 초등학생 시절에는 무턱대로 서점 전체를 뒤져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집어오는 식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책 한 권 사는데 3,4시간은 기본으로 걸리는 무식한 방법이었지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이라는 건 그 때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어요. 어떤 책이 좋다고 말해주는 자료는 거의 구할 수가 없었으니까.

(중략)

그리고 이듬해 초에 저희 집에도 인터넷이 설치되었습니다. 속도도 느린 모뎀으로 접속을 하고, 제가 야후 코리아에서 가장 먼저 검색해본 단어가 '판타지'였습니다. 장난 삼아 한 거였죠. 헌데 판타지 소설 관련 사이트가 100개도 넘게 쏟아지더군요. 경악했고, 경이로웠습니다. 자발적으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집단이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지요.

이 글을 읽으며 떠올렸던 사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무렵의 내게는 책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이 정말로 절실했다. 두번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그게 좀 더 명확해진다. 나는 그들이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집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반겼다.

거기에서 떠오른 두번째. 굳이 판타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 없지 않았을까. 어쨌든 당시의 나는 장르를 막론하고 책에 대해 이야기나눌 사람들 자체가 필요했다. 심지어 나는 내게 전혀 생소한 장르를 배워 익혀서라도 그 '책에 대한 이야기'에 끼려고 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꼭 '판타지'일 필요는 없었다. 추리나 SF, 호러였어도, 심지어 로맨스였어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당시의 내게 중요한 건 독서가로서의 '생존'이었으니까.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에는 유감이 없다. 그랬으면 사실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거다. 판타지는 그 자체로도 정말 매력적인 장르이지만, 내게 책 정보 찾는 법을 가르쳐준 은인이기도 하다. 지금의 내가, 적어도 10년 전 중1 때처럼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몰라 헤매지 않는 건 오롯이 판타지란 장르의 공이고 그 판타지를 통해 만났던 수많은 독서가들의 공이다. 그런 장르를 미워하기란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 팬덤. 10년간 변한 건 나만이 아니다. 팬덤도 변했다. 그것도 내게는 썩 불유쾌한 방향으로. 지금에 와서 내가 왕년에 판타지 팬덤에게서 느꼈던 경이감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보다 윗세대에 해당하는 판타지 팬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하이텔 환동, 워터가이드, 드라클 등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 동안 팬덤들이 축적해왔던 성과들도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다. 앞에서 선도해줄 선배 세대 팬덤도, 곁에서 함께 감상을 공유할 동료 팬덤도 거의 없다. 딱히 선도하는 이들까지 바라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즐겁게 읽은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공감을 얻을 이들 정도는 바라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요즘 장르문학 커뮤니티의 대부분은 정말 종류를 불문하고 책 이야기만 해줘도 감지덕지할 판국이니...

이런 상황에서도 굳이 장르문학 커뮤니티들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가만 곱씹어보면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그만둔다고 해서 딱히 잃을 게 많지도 않다. 기왕 말했듯이 내가 최근 들어 활동하던 커뮤니티 중에서 나와 성향이 맞아보이는 이는 정말 드물고, 그런 이들은 대부분 굳이 그 커뮤니티를 찾지 않는다 해도 접촉할 방도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건, 서로의 블로그를 찾아주건.




슬슬 매트릭스에서 떠날 때도 되었다는 이야기다.
Posted by 아프락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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